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폴레토 공국 (문단 편집) === [[프랑크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이탈리아 왕국]]의 봉신 ===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위니게스]]'''는 799년 4월 25일 교황 [[레오 3세]]가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전에서 성 로렌스 성전으로 가던 중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성 에라스무스 수도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마로 달려가서 교황을 카롤루스 대제가 있는 파데보른까지 호송하면서 신변을 보호했다. 802년 알 수 없는 이유로 루체리아에서 베네벤토 대공 그리말트 3세와 맞붙었다가 생포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815년 로마에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탈리아 국왕 베르나르도의 지시에 따라 로마로 진군해 진압했다. 822년 고령으로 집무를 더 이상 보기 힘들어지자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위니게스 사후 브레시아 시의 백작이었던 '''[[수포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했다. 그는 브레시아를 아들 [[마우링]]에게 넘겨주고 스폴레토에서 공무를 수행하다가 2년 만에 사망했다. 뒤이어 스폴레토 공국에서 궁전백을 역임하던 '''[[아델라트]]'''가 새 공작에 취임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5개월 만에 사망했고, 수포 1세의 아들 '''[[마우링]]'''이 새 공작에 취임했다. 아인하르트(Eginhard)[* 775 ~ 840, [[프랑크 왕국]]의 궁정 시종이자 학자]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며칠 만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사후 수포 1세의 또다른 아들 '''[[아델치스(스폴레토)|아델치스]]'''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아델치스는 10년간 공국을 이끌었다고 전해지나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프랑크 국왕 [[루도비쿠스 1세]]에 의해 알 수 없는 이유로 낭트 백작 '''[[랑베르 1세]]'''로 교체되었다. 랑베르 1세는 부임한 지 2년 만인 836년 토스카나 일대를 강타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고, '''[[베렝게르]]'''가 새 공작에 선임되었다. 베렝게르에 대한 행적은 837년 7월에 파르파 수도원에 상당량의 기부금을 바친 사실만 알려졌으며, 843년 랑베르 1세와 롬바르디아 국왕 [[피핀 카를로만]][* [[카롤루스 대제]]의 차남이다.]의 딸 아델라에데의 아들인 '''[[귀도 1세]]'''가 [[로타리우스 1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것을 볼 때 그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843년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귀도 1세는 [[베네벤토 공국]]의 대공 [[지코(베네벤토)|지코]]의 딸 이타와 결혼함으로써 베네벤토 공국과의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후 베네벤토 공국의 내전에 개입해 [[살레르노 공국]]의 [[지코눌프]]를 공개적으로 지원하면서도 지코눌프에 대적하는 [[라델치스 1세]]에게도 일부 병력을 비밀리에 보내주고 상당한 뇌물을 받아냈다. 846년 [[사라센]]이 성 피에트로 수도원을 약탈하는 등 라치오에서 활개치자 토벌에 나서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사라센들이 성 피에트로 수도원의 보물을 전부 챙기고 탈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858년 카푸아 백국의 란도 1세와 살레르노 공국의 [[아데마르(살레르노)|아데마르]] 대공이 맞붙었을 때 아데마르를 지원하면서 소라와 아르피노의 리리 강 계곡의 소유권을 확보했다. 860년 귀도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람베르토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마르시 백작 제라르, 텔레세의 가스탈트(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 말레포토, 보이아노의 가스탈트 완델베르토와 함께 바리 토후국의 에미르 사우단이 카푸아와 테라 데 라보로를 심각하게 약탈한 뒤 바리로 돌아가는 것을 저지했다. 그러니 뒤이은 혈투 끝에 사라센이 길을 뚫는 데 성공하면서, 사우단이 바리로 돌아가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860년 4월 카메리노 백작 힐데베르트와 함께 이탈리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르시에서 루도비코 2세의 군대에게 패배한 뒤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에게 망명했다. 루도비코 2세는 한동안 베네벤토를 포위했다가 람베르토 1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재차 맹세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스폴레토에 복귀하는 것을 허락했다. 866년 카푸아 백작 란둘프 2세를 체포한 루도비코 2세는 자신을 도운 람베르토에게 카푸아 백국을 가지도록 허락했다. 867년 11월 13일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선출된 후 12월 13일 교황의 대관식이 열렸을 때, 람베르토 1세는 자신에게 사사건건 맞서는 [[교황령]]에게 본 때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루도비코 2세의 지시에 따라 로마를 약탈했다. 람베르토는 즉시 [[파문]]당했지만, 정작 루도비코 2세는 하드리아노 2세와 화해하고 그를 복권시키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람베르토 1세는 871년 루도비코 2세가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고 있을 때 살레르노 공국의 [[구아페르]],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와 동맹을 맺고 루도비코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 때 루도비코 2세가 베네벤토에 억류되면서 반란이 성공하는 듯했지만, 아델치스가 사라센의 침략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루도비코 2세를 풀어주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북이탈리아에 돌아온 루도비코 2세는 람베르토 1세를 스폴레토 대공위에서 해임하고 [[아델치스(스폴레토)|아델치스]]의 아들 '''[[수포 2세]]'''를 새 공작으로 선임했다. 람베르토 1세는 베네벤토로 망명했고, 루도비코 2세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그를 잡으러 시도할 수 없었다. 875년 루도비코 2세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한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2세]]는 876년 수포 1세를 사임시키고 람베르토 1세를 스폴레토 공작에 복위시켰다. 샤를 2세는 이에 더해 람베르토 1세의 형제 [[귀도 3세]]를 교황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카메리노 변경백으로 임명했다. 샤를 2세는 그해 7월 16일 폰티온에서 스폴레토 공국의 상당 부분을 교황에게 기부하기로 해,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교황과 가급적 잘 지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877년 샤를 2세가 사망했다. 람베르토 1세는 샤를 2세의 아들 [[루이 2세]]보다는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국왕이 될 야심을 품고 로마로 진군해 878년 3월 토스카나 변경백 [[아달베르토 1세]]와 함께 로마를 포위했다. 교황 [[요한 8세]]는 트루아로 피신한 뒤 서프랑크 국왕 루이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람베르토와 아달베르토 1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가 879년 4월에 급사해버리면서, 그가 이탈리아 국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람베르토 1세는 로마 공략에 실패한 뒤 목표를 카푸아로 돌리고 880년 카푸아 공방전을 감행하다가 도중에 사망했다. 사후 아들 '''[[귀도 2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귀도 2세는 교황령을 공략하여 영토를 남서쪽으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교황 [[요한 8세]]는 협상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하고 교황령으로 쳐들어가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요한 8세는 [[카를 3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삼아줄 테니 교황령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간질과 뇌졸중으로 시달리고 [[바이킹]]의 침략에 직면했던 카를 3세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882년 2월 카를 3세가 라벤나에서 회의를 소집해 양자의 화해를 주선했다. 귀도 2세와 삼촌인 카메라노 변경백 [[귀도 3세]]는 빼앗아간 교황령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요한 8세는 '두 귀도'가 약속을 지킬 기미가 없다며 카를 3세에게 응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렇듯 카를 3세가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으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듯했지만, 귀도 2세는 883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 [[귀도 4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삼촌 '''[[귀도 3세]]'''가 스폴레토 공작을 맡았다. 885년 1월 7일, [[아르눌프]]가 이끄는 바이에른군과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의 군대가 스폴레토 공국 북쪽 경계에 이르자, 귀도 3세는 파비아로 달려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3세]]에게 그동안 자신이 교황령과 카를 3세에게 대적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해 사면을 받아냈다. 이후 새 교황 [[스테파노 5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사라센]]과 동맹을 맺고, 베네벤토 공국으로 쳐들어가 베네벤토를 공략하고 [[아이울프 2세]]를 포로로 잡았지만, 얼마 후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스폴레토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 사이에 아이울프 2세가 감옥에서 탈출해 베네벤토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887년 11월 아르눌프가 카를 3세를 퇴위시키고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자, 랭스의 대주교이자 친척인 폴크가 [[카롤루스 왕조]]와 혈연 관계가 있었던 귀도 3세를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에 추대했다. 귀도 3세는 즉시 호응해 프랑스로 향했지만, 888년 1월 파리 백작 [[외드]]가 바이킹족을 물리쳐 왕국을 구해낸 공로로 서프랑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국왕이 되었다. 이후 외드와의 정쟁에서 밀려 이탈리아로 돌아간 그는 이탈리아 국왕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889년 이탈리아 국왕을 자처한 베렝가리오 1세를 성공적으로 물리친 그는 파비아에서 [[롬바르디아 철관]]을 쓰고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다. 이후 스폴레토 공국은 귀도 3세의 조카이자 귀도 2세의 아들인 '''[[귀도 4세]]'''에게 돌아갔다. 귀도 4세는 스폴레토 공작이 된 뒤 귀도 3세의 통제를 받다가 894년 12월 귀도 3세가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에게 패배한 뒤 후퇴하던 중 타로 강 근처에서 급사하면서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895년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전역을 석권하고 롬바르디아 테마를 건설한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레온 6세]]의 부름을 받고 발칸 반도로 돌아가서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대제]]와 맞섰다. 그는 이로 인해 남부 이탈리아에 주둔한 동로마군이 약해진 틈을 노려 공세를 개시해 베네벤토에서 동로마군을 축출한 뒤 베네벤토 대공을 겸임했다. 이후 여동생 이타의 남편인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1세]]에게 베네벤토 섭정을 맡겼지만, 과이마르 1세가 베네벤토로 가던 도중에 동로마 황실에 의해 가스탈트로 선임된 아벨리노의 아델페리오가 도중에 습격해 포로로 삼았다. 귀도 4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아벨리노를 포위 공격해 과이마르 1세를 돌려받았다. 897년 귀도 3세의 아들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람베르토]]를 만나러 로마로 갔다가 테베레 강변에서 귀도 3세의 시종이었던 '''[[알베리크]]'''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 후 알베리크는 스폴레토 공작과 카메리노 변경백에 선임되었고, 베네벤토 대공에는 지난날 스폴레토 공국에 망명했던 [[라델치스 2세]]가 귀도 3세의 아내이자 그의 누이인 아게투르데의 지원에 힘입어 복위했다. 알베리크는 귀도 4세를 살해하고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뒤 899년 또는 900년에 베렝가리오 1세의 대 마자르 전쟁에 참여한 공으로 베렝가리오 1세로부터 스폴레토와 카메라노의 영유권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904년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와 함께 [[대립교황]] 크리스토포로를 폐위시키고 [[세르지오 3세]]를 교황으로 옹립했다. 909년 테오필락트 1세의 딸 마로치아와 결혼했다. 일부 학자들은 [[마로치아]]가 세르지오 3세와 성관계를 맺으면서 태어난 [[사생아]]로 알려진 [[요한 11세]]는 사실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하는 명백한 근거는 없다. 또한 훗날 로마의 통치자가 된 알베리크[* 알베리크 '2세'로도 칭해지나, 스폴레토 공작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와 네피 주교 세르지오, 교황 [[베네딕토 7세]]의 아버지인 다비드 또는 테오다투스가 그의 자식으로 전해진다. 917년. 알베리크는 테오필락트의 지원에 힘입어 로마인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들을 숙청하다가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고, 결국 922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즈음에 스폴레토에서 '''[[보니파초 1세]]'''라는 인물이 스폴레토 공작을 자처했다는 일부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볼 때 스폴레토에서도 권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니파초 1세의 통치에 관련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924년 교황 [[요한 10세]]의 형제인 '''[[피에트로(스폴레토)|피에트로]]'''가 마로치아의 권세에 위협을 느끼고 형을 설득해 스폴레토 공작에 부임했을 즈음에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피에트로는 스폴레토 공작 부임 후 오르테 호숫가에 거점을 마련한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926년 로마로 귀환해 [[귀도(토스카나)|귀도]]와 마로치아를 일시적으로 제압하고 권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928년 토스카나 변경백 귀도가 비밀리에 군대를 모아 라테라노 궁전을 기습 공격했다. 그는 귀도가 이리 나올 줄 예상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붙잡힌 뒤 형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절단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요한 10세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몇 달 만에 옥사했다. 이후 [[보니파초 1세]]의 아들인 '''[[테오발트 1세]]'''가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다. 929년 [[베네벤토 공국]]의 [[란둘프 1세]], [[살레르노 공국]]의 [[과이마르 2세]]와 동맹을 맺고 [[동로마 제국]]령인 루카니아와 칼라브리아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황제에게 봉사하는 내시로 삼겠다"며 전원 [[거세]]했다. 그러나 이어진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과이마르 2세는 동로마 제국의 반격이 거세지자 동로마 제국에 도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936년 테오발트 1세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 국왕 위그는 이브레아 변경백이었던 '''[[안스카리오]]'''를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했다. 939년 위그가 라벤나를 직할지로 삼고 중앙집권화 및 확장 정책을 추진하자, 안스카리오는 로마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알베리크와 동맹을 맺고 위그에 대항하려 했다. 이에 위그는 그가 자신의 정책에 방해된다고 여기고, 940년 봄 스폴레토 귀족 '''[[사를리오]]'''에게 안스카리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는 이에 맞서려 했지만 다른 귀족들이 사를리오에게 호응하는 바람에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를리오는 안스카리오의 뒤를 이어 스폴레토 공작이 되었지만, 943년 위그가 사를리오에게 안스카리오를 살해한 죄를 물어 수도원으로 은퇴하도록 강요하고 토스카나 변경백을 맡고 있던 사생아 '''[[우베르토]]'''가 스폴레토 공작을 겸하게 했다. 946년 이브레아 변경백 베렝가리오 2세가 위그를 몰아내고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보한 후, 우베르토는 베렝가리오 2세의 압박에 못 이겨 스폴레토를 '''[[보니파초 2세]]'''에게 넘겼다. 보니파초 2세는 아들 '''[[테오발트 2세]]'''와 함께 스폴레토를 다스리다가 953년에 사망했다. 이후 테오발트 2세가 단독 공작이 되었지만, 959년 베렝가리오 2세가 [[오토 1세]]를 지지하는 인사들을 숙청할 때 그 역시 오토파로 지목되어 축출되었다. 파르파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테오발트 2세가 물러난 후 '트라사문트([[트라사문트 3세]])'라는 인물이 공작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교차검증]]할 다른 문서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실존 여부가 불분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